인문학총람- 목요학습 63

리좀

Rhizome 根茎

 

오늘은 감자를 캐는 날. 어린 K는 하얗고 둥근 감자를 캐고 싶어 일찍 일어났다. 그리고 호미를 들고 아버지보다 앞장서 밭으로 나갔다. 감자나 고구마의 땅 속의 줄기와 뿌리는 땅위의 줄기와 다르다. 이런 형태를 리좀이라고 한다. 한편 나무는 좌우대칭의 질서정연한 형태로 줄기가 배치되어 있다. 이것을 수목구조라고 한다. 고대나 중세도 그랬지만 특히 근대사회는 수목처럼 구조화되어 있으며 군대처럼 질서화 되어 있고 피라미드처럼 체계적이다. 이 수목구조와 반대되는 개념이 리좀구조다. 식물학에서 말하는 리좀은 땅속에서 수평적으로 뻗어있는 구근(bulbs)이나 덩이줄기(tubers) 형태의 뿌리를 말하는데 형태상으로는 땅에서 하늘로 향하지 않고 땅에서 땅속을 향하고 있다. 또한 리좀은 수목(Arbolic) 구조와 달리 계층화, 구조화되지 않고 중심이 없으며 모든 것이 중심인 열린 구조이다.

들뢰즈(G. Deleuze, 1925 ~ 1995)와 가타리(F. Guattari, 1930 ~ 1992)는 『천 개의 고원』에서 근대사회와 이성주의를 비판하는 개념으로 리좀을 차용했다. 이성과 논리가 설계하고 자본과 법으로 실현되는 근대사회는 수목구조와 같은 완결성을 추구하지만, 수목구조로는 이해할 수 없고 실현할 수도 없으므로 리좀구조의 열린 사유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수목구조라는 개념에 함의된 근대의 과학, 제도, 권력, 정주, 자본, 제국, 합리, 이성 등을 해체하는 한편 새로운 사유의 틀이 필요하다고 보고 리좀에 다원적 무질서와 예측불가능한 우발성을 삽입했다. 이런 사유로부터 탄생한 리좀은 ‘망상조직과 같은 다양체’*이며 여러 특징을 가진 다질성의 복합체다. 한편 이들의 리좀은 노자나 장자 등 도가(道家)의 사유와 유사한 면이 있지만 발생구조적 토대가 다르고 사상적 계보도 다르다.

리좀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며 사이와 중간이고 종단하면서 횡단하는 동시에 융합하면서 통섭한다. 사유의 말이 창조의 역동성과 가변성을 가능케 하는 내재의 평면(Plane of Immanence)을 무한 질주하는 것이다. 당연히 리좀은 고정된 체계나 구조가 없고 중심이 없을 뿐만 아니라 질서도 없고 인과관계도 아니며 다층적이고 다원적이다. 또한 리좀은 선형, 원형, 방사형, 등의 유클리드 기하학적 위계가 아니고 동형반복의 프랙탈(Fractal) 기하학도 아니며 연기나 안개와 같은 형상이다. 그런 점에서 리좀과 연계되는 또 다른 어휘들은 기관 없는 신체(Body without Organ)와 강열도 그리고 인터넷 노마드(Internet Nomad) 등이다. 특히 리좀은 서양철학 특히 후기구조주의의 탈영토, 탈근대, 탈중심, 기관 없는 신체와 같은 담론과 함께 이해되어야 하고 들뢰즈의 철학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리좀에 내포된 ‘그래서’ 또는 ‘그리고’라는 접속사가 함의하듯이 연결되는 망이 있기는 하지만 그 자체의 고정된 완결성을 부정한다. 특히 리좀은 단절이 있어도 곧 복구되는 유연성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천개의 고원]에서 데칼코마니(decalcomania)처럼 서로 섞이고 통섭하는 이질성(heterogeneity)의 상호연결, 다원성(multiplicity) 등을 강조한다. 특히 연기나 안개처럼 인간의 사유나 조직도 자유롭다. 특히 고정된 사유, 고정된 구조, 정형화된 방법이 아니고 불확정, 불확실, 애매모호, 자유, 열려있음, 변형가능성 등이 바로 리좀의 특징이다. 리좀의 망상성, 다질성, 불확정성, 혼돈이야말로 ‘무엇이 어떻다’와 같은 규정을 거부하는 리좀적 사유다. 이런 사유에서 파생된 리좀은 수직적이고 정주적인 사유와 고정된 영토를 추구하지 않는다. 반대로 수평적이고 유목적인 사유와 탈영토/재영토를 통하여 새로운 관계나 존재를 지향한다.

들뢰즈와 가타리 사유의 종착점은 정신분열증을 강요하는 자본주의 근대를 탈주하고 전복하는 것이다. 고정된 영토를 끊임없이 해체하여 탈영토화하고 또 다시 재영토화하면서 탈주의 비상선(Line of Flight)을 통과한 다음 개방적이고 유연하게 횡행한다. 이들이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보여준 것과 같이 자본주의 생산의 욕망은 가족구조에서 순치된 이후 사회화 된다. 따라서 자본주의적 생산과 소비는 피라미드처럼 고정된 수목구조이므로 이것을 해체하고 유연하게 만들어 진정한 인간성을 회복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볼 때 리좀은 온갖 구조적이고 위계적이고 체계적인 것 즉, 폭력적인 것으로부터 탈주하고 날아가는 비상선을 의미하기도 한다. 유목적 사유라고 할 수도 있는 리좀은 철학, 사회학뿐만 아니라 예술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는데 예술의 상상력, 표현, 자유감성 등도 리좀적 사유와 본질적으로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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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나 인용을 했을 경우에는 정확하게 출처를 밝혀야 합니다. 표절은 범죄입니다.

*참고문헌 Gilles Deleuze and Félix Guattari. A Thousand Plateaus. trans., Brian Massumi, (London and New York: Continuum, 2004).

*참조 <기관 없는 신체>, <노마디즘>, <내재의 평면>, <안티 오이디푸스>, <욕망기계>, <탈영토>, <탈주의 비상선>, <초원의 사상>

Last modified: 2018년 11월 7일